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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네트 메사제 전

 세상의 두 손은 오늘도 비극과 코미디를 동시에 쥐고 있다.

세상의 두 다리는 오늘도 죽음의 재앙과 생명의 신비를 동시에 딛고 서 있다.

그리고 이것은 곧 인간의 크고 작은 일상이기도 하다. 화합과 번영의 상징이라는 올림픽 앞에서 티베트와 중국의 누군가는 목숨을 잃어버렸고 쇠고기 재협상을 외치다 공권력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굳이 거창한 경우를 들지 않더라도 우리는 무수히 자잘한 상반되고 모순된 상황을 만들기도 하고 그 안에 휘말려 들기도 한다. 그런 일상이 삶의 축을 만들고 그 축이 또한 부조리하기도 하고 희망적인 동시에 절망스럽기도 한 세상을 굴려나간다.

 

국립 현대 미술관에서 감상한 아네트 메사제의 작품들은 이러한 일상과 삶, 세상의 모순된 단편들과 닮아 있었다. 그의 오브제 속에는 메두사의 머리처럼 동시다발적인 모순과 감정이 숨겨져 있었고 그것들은 비명과 침묵을 동시에 갖고 있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 앞에 있으면 관람자 입장에서의 느긋한 감상보다는 낯설고 거친 환경에 내던져진 포로의 당혹스런 시선이 앞선다.

 

* 검은 얼룩(the black spots. 2006)

 당혹스러운 시선<검은 얼룩>이라는 작품에서부터 시작됐다. 벽에 뚫려있는 작은 직사각형 구멍을 통해 본 넓은 안쪽에는 까만 깃털들이 촘촘히 매달려 있었다. 몰래 훔쳐보는 자의 두려우면서도 호기심 어린 시선은 어둡고 서늘한 공간을 메우고 있는 뜻밖의 모빌들에 흠칫 놀란다. 지금은 매달려있는 사물에 불과하지만 과거에는 생명체의 부분이었을 깃털은 그것들을 매달고 있는 실과 공기에 의해 조금씩 움직인다. ‘생물의 본능을 지닌 죽은 물체가 그 과거를 기억하려 안간힘을 쓰는 듯이 천천히 공간을 부유한다. 시야를 좁게 하는 구멍은 이러한 광경을 더욱 노골적이고 기이하게 보여준다. 또한 저것들이 실제로는 살아있는 것이 아닌지 하는 근거 없는 두려움마저 안겨준다.

 

* 매달린 자들의 발라드

저마다 다른 모습의 인형들이 천장에 매달려 정해진 궤도를 따라 빙빙 돌고 있는 설치 작품 <매달린 자들의 발라드>는 동화적인 동시에 현실적인 느낌을 준 작품이었다. 소재(인형)가 지니고 있는 천진함은 그것들의 행위- 축 늘어진 채 무한 반복 해 도는 것으로 인해 피로와 권태로움으로 바뀌어 간다. 정해진 경로를 따라 쉭쉭 거리며 돌아가는 인형은 그 소리만큼이나 규칙적이며 복종적이고 불안해 보인다.

 

* 피노키오의 발라드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인형의 모습은 동화 피노키오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했다는 ‘피노키오의 발라드’ 에서 재현된다.

베개 위에 누운 피노키오는 사각의 선을 따라 정지된 베개 더미 주위를 돌고 있다. 나무 인형 피노키오가 우여곡절 끝에 인간이 된다는 내용을 작가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재 해석 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장난감 기차의 움직임을 연상케 하는 사각의 선과 움직이는 베개- 그 동화적인 장치 속에서 피노키오는 인간이 되기 위해 부딪혔던 수많은 에피소드를 반복적인 움직임으로 재현해 나간다. 이런 행위는 무생물을 생물로 만드는, 또는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내는 주술적인 의식과도 닮아 있는 듯 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작가가 베개 (또는 베개 더미)를 남성의 성기로 가정했다고 하는 점이다. 주위에 어지럽게 쌓여 있을 뿐인 베개(남성의 성기)는 이 생명 탄생 의식에서 주체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고 그저 정지되어 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예술 작품 곳곳에 배어있는 '남성적인 시선과 사고'에 대한 시니컬한 농담 같은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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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지노 (Casino. 2004) / 부푼, 가라앉은
 
움직임이 생명을 불어넣는 일종의 의식처럼 작용한 작품 중에서 압권은 <카지노>였다. 검은 공간에서 붉은 색 실크천이 엔진과 컴퓨터 장치에 의해 파도처럼 너울대며 방안 가득 분출한다. 주위는 적막하고 서늘한 심연 같았다. 그 고요를 뚫고 펼쳐지는 선명한 붉은색의 파도는 태아가 출산되기 직전, 자궁에서 터지는 피처럼 신비함과 급박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시차를 두고 벌어지는 이 원시적인 움직임을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으면 나 자신도 함께 쏟아져 내려와 이곳에 떨어졌다는 착각이 든다. 생명의 탄생이라는 한 장면을 다이내믹한 스케일로 경이롭게 표현한 이 작품에 2005년 베니스 비엔날레는 황금 사자상을 선사했다고 한다.

침구처럼 아늑하고 온화한 색감을 가진, 바닷속 생물들을 연상케 하는 물체들이 숨을 쉬듯 수축하고 팽창하는 작품 <부푼, 가라앉은> 또한 심연에서 꿈틀거리는 생명체들이 자신의 살아있음의 신호를 모르스 부호처럼 우리에게 보내고 있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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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과 우리, 우리와 그들
 
지금까지의 작품이 살아있지 않은 것에 대해 생명을 불어넣었던 작업이었다면 <그들과 우리, 우리와 그들>같은 작품은 살아있는 것을 박제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천장 가득 매달려 있어 멀리서 볼 때에는 화려하고 예쁜 오브제들. 그러나 실제로는 새의 몸통에 동물 인형의 머리를 한 죽은 생물이었으며 사람들의 일그러진 표정은 오브제에 매달린 거울들을 통해 여과 없이 비춰진다. 하지만 은 생명체를 아무 준비 없이 직면했을 때의 놀라움과 공포는 서서히 동정과 연민으로 바뀌어간다. 이러한 감정의 변화가 거울을 통해 투영되는 순간 죽은 새와의 작은 교감이 시작된다. 이 짓궂은 장난과 같은 작품 앞에서 살아있는 나는 저 새를 통해, 새는 살아있는 나를 통해 생과 사를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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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숙생들

어떤 것은 다리가 모아진 채로, 어떤 것은 좍 펼쳐진 채로, 저마다 다른 자세를 한 죽은 참새들이 유리장에 일렬로 진열되어 있다. 차마 똑바로 볼 수 없는 참새들의 수많은 눈들은 둘째 치더라도 죽은 새들을 모아 털실로 하나하나 짠 옷을 해 입힌 작가의 섬뜩한 정신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죽음으로 이르게 하는 끔찍한 괴롭힘과 으로 상징되는 보호 또는 보듬어주는 모성애의 감정이 서로 강하게 부딪히고 깨져 <기숙생들> 주위에는 기묘하고 날카로운 파편들이 즐비하다. 그리고 그 시퍼런 애증의 파편 날에 보통의 감수성을 갖고 있는 나는 사정없이 찔리고 말았다.

 

아네트 메사제는 작가는 삶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그 말의 의미를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살아있는 것을 매달고 비틀고 무생물과 합체시키면서 죽음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또한 생명이 없는 것에 움직임을 불어넣으면서 살아있는 것 또한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그래서 끔찍하기도 하면서 귀여운, 때로는 거대한 심연의 동굴과 같은 이 오브제들이, 가변적이고 모순된 상황이 반복되는 인생의 실제 얼굴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한 것이다.

 아네트 메사제는 이러한 혼돈의 삶에 분노하기도 하지만 또한 숙명처럼 떠안은 이것을 보듬어 주기도 한다. 마치 죽은 새를 동정하면서 만들어 입힌 옷처럼 그는 격정적이고 불안한 맥박으로 뛰고 있는 살아있음에 작은 안도의 감정을 입힌다.

 

"예술가가 되지 않았다면 저는 인생을 막 살고, 망쳐 버렸을 거예요. 제게는 예술이 구원이었어요. 작품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우울해지지요. 그러다가도 거리에 햇볕이 내리쬐고 귀여운 고양이가 거리를 가로지르면 자기도 모르게 삶과 화해하고요."